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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x인어 au)
이해할 수 없대도 의심하지 마.
새벽까지 쏟아지던 장맛비가 가시고 말간 태양이 떠올랐다. 울긋불긋한 여름 꽃들은 일제히 고개를 들었고, 갓 개인 하늘 위로 물방울이 툭, 떨어지면 파란 그림자가 일렁였다. 모든 것들이 허물을 벗은 듯이 선명하게 반짝였다. 여기, 웅덩이에 고개를 처박을 기세로 머리를 기울인 한 아이를 제외하고서 말이다. 기다란 은빛 머리카락이 웅덩이 위로 비치자 새하얀 그림자가 구름처럼 흘러갔다. 눈을 한 번 깜박이면 새파란 바다를 닮은 빛이 슬쩍 나타났다가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아이는 흐릿한 모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젖혔다. 그날은 무척이나 습했다. 둥근 이마에 샛노란 태양이 쉴새없이 빛을 쏘아댔다. 정오의 가혹한 열기는 아이에게는 가혹한 처사였고, 조그만 웅덩이는 아이의 땀을 식혀 주기에는 너무나도 작았으며, 그마저도 땡볕에 점점 말라갔다. 물웅덩이에 질려버린 아이는 머리통을 까닥까닥 흔들며 저를 두고 나가버린 부모들을 실컷 혼내는 상상을 했다. 벽에 그림을 잔뜩 그려놓는다든지 찬장에 들은 과자를 한두 개 꺼내먹는다면 무심한 부모에게 충분한 벌이 될 것이다. 어쩌면 동네 고양이를 따라 들로 놀러 나가버려도 재밌을 테다. 그러나 아이는 그런 나쁜 짓을 벌이기에는 영 귀찮았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도 싫은 날이지 않은가. 그러므로 습한 날까지 꾸중을 듣기는 싫을 뿐이라고 생각한 채 못된 장난 목록을 접어버렸다. 수평선 저 멀리 보이는 바다는 아이의 속도 모른 채 하염없이 새파랬다. 그렇지, 바다. 바다에 가서 발을 담그면 습한 기운도 좀 가실까. 물론 바다 또한 들과 같이 아이가 혼자 가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오히려 혼자 갔다간 큰일날 수 있다고 신신당부를 들은 곳이기까지 하였다. 아이는 입술을 삐쭉이며 고민에 빠졌다. 맨 땅에서 열기에 익사할까, 나중에 불호령을 듣을까. 어느 쪽이든 그다지 달가운 선택지가 되지는 못했다. 아이는 몸을 웅크린 채 흙바닥 위로 몸을 굴렸다. 흙먼지가 물씬 피어오르고, 아이는 재채기를 한바탕 터뜨렸다. 엣취! 그 순간 바다에서 쨍한 빛 한 줄기가 반짝였다. 아이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잘못 본 걸까? 아주 잠깐 눈을 빼앗은 강렬한 빛은 그새 신기루인 양 사라지고 없었다. 한여름날의 더위가 아이를 말라 죽이다 못해 환상을 보여 준 노릇일지도 몰랐다. 아이는 한구석에 벗어 두었던 샌들을 챙겨 일어났다. 그것이 무엇이든, 설령 가짜래도 호기심은 해결하고 봐야 했다. 아이는 질척이는 흙길을 따라 바다로 향했다.
진흙이 자갈로 변하고, 자갈이 모래가 되어 발 틈으로 잘게 부서질 즈음 아이는 바다에 도착했다. 반짝이던 것은 무엇일까. 낚시꾼들이 버리고 간 물통일까? 아니면 파도에 떠밀려 온 사금파리 조각일까? 이왕 예쁜 조약돌이라면 좋을 테다. 아이는 기대감에 가득 찬 채 고개를 쭉 뻗었다. 수평선 너머로 갈매기 한 마리가 소리를 기일게 빼며 날았다. 집 근처 절벽에 사는 갈매기일 것이다. 먹이 사냥을 하러 가는 모양이다. 햇살은 파도처럼 한 번에 밀려 들어왔다가 백사장에 부딪치며 산산히 부서졌다. 금빛 모래가 물결에 일렁이며 깊은 바다 속으로 스르르 녹아들었다. 사방이 고요한 가운데 파도 소리만 철썩 철썩 일었다. 아이가 눈을 뜬 시절부터 지금까지 변한 적 없는 풍경었으며, 고즈넉하고 지루했다. 아이는 바닷가를 이리 저리 돌아다니다가 금세 흥미를 잃고 말았다. 온갖 곳을 둘러보아도 빛의 정체라고 가리킬 만한 물건은 없었다. 정말로 신기루였던 모양이지. 아이는 짧게 혀를 찼다. 꾸중을 들을 각오까지 하고 온 것 치고는 너무 싱거웠다. 당장 돌아가기엔 억울한 기분까지 들었다. 아이는 바다에 발이라도 담글 생각으로 백사장을 걸었다.
해가 꼭두에 서고 아이는 무한히 이어질 것만 같은 샛노란 모래의 향연을 지나 검은 바위로 다가갔다. 등대처럼 우뚝 선 바위는 바닷가에서 유일하게 아이의 놀이터가 되어 주는 녀석이었다. 아이는 특히 바위에 올라타 놀길 좋아했는데, 비좁은 틈을 간신히 비집고 기어오르면 바다가 아득한 곳까지 훤히 트여 보였다. 그러나 아이 혼자 바위를 오르면 위험할 수도 있었다. 아이는 바위를 올려다 보았다. 거무죽죽한 색채 위로 희멀건 무언가가 언뜻 비쳤다. 낚시하는 어른일까? 그러기에는 너무 작았다. 아이는 한 발자국 더 다가갔다. 어른거리던 흰 빛은 이제 뒷통수를 확연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커졌다. 곱슬거리는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렸다. 여자애? 이 근방에 여자애가 살았나? 그 순간 해풍이 불었다. 바위에 걸터 앉아 있던 낯선 이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댔다. 아이는 언젠가 저곳에서 미끄러져 크게 다칠 뻔한 기억을 떠올렸다.
"거기, 야! 위험해!"
아이는 낯선 이를 향해 소리쳤다. 하얀 머리통이 뒤를 돌았다. 나뭇잎 뒷장처럼 연한 녹빛의 눈동자가 아이를 쳐다보았다. 그런 색을 가진 눈동자는 생전 처음이었다. 아이의 눈에 비친 소년은 꼭 파도를 한 조각 떼어다 빚어 만든 듯이 생겼다. 아이는 소년의 긴 머리칼을 보고 여자애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가슴이 아주 판판했다. 금방이라도 바다에서 뛰쳐 나온 것처럼 물기 어린 남빛 피부가 햇빛에 어른댔다. 소년의 곧게 뻗은 팔뚝 위로는 소금기가 말라 붙어 희게 반짝였다. 아이는 문득, 어이 없는 말이지만, 자신이 보았던 빛이 소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소년이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그제서야 아이는 소년을 지나치게 빤히 쳐다보고 있었음을 깨닫고 고개를 훽 돌려버렸다. 소년이 입을 벌렸다. 맨몸을 쳐다보았다고 화를 내려는지도 모른다. 아이는 햇살에 벌겋게 익어버린 뺨을 손으로 식혀 보며 소년을 옆눈으로 보았다.
"... ..."
소년은 입술을 달싹였다. 그것은 질책도, 인사도 아니었다.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이 계속 입술을 움직였다.
어 - - . 아 - - . 애 - - .
아이는 소년의 입술을 따라 움직이며 그의 의사를 읽었다. 소년은 아이의 말을 흉내내고 있었다. 소년은 아이를 바라보는 그대로 한 손을 휘휘 저어 보였다. 아이는 홀린 듯이 소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아이는 바위를 기어 올랐다. 소년은 바위 위에서 생글생글 미소 짓고 있었다. 꼼짝도 않고 웃고만 있는 모양이 조금은 얄밉게 보였지만 간만에 생긴 또래였다. 아이는 거친 표면을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딛고 올라갔다. 몸이 덜 자란 애가 오르기에는 제법 가파른 높이였지만 바다 마을에서 나고 자란 아이에게 크게 어려울 것 없었다. 아이가 바위 위로 기어 오르자 바닷바람이 아이를 덮쳤다. 아이는 자빠질까 얼른 바위에 납작 엎드렸다. 소년은 아이를 보고 소리 없이 크게 미소지었다. 반짝이는 녹빛 눈동자가 아이를 향했다. 벌어진 입 사이로 유난히 날카로운 송곳니가 눈에 띄었다. 아이는 무심코 소년을 향해 오른손을 뻗었다. 소년은 왼손을 뻗었다. 아이의 잿빛 손바닥 위로 파랗고 길쭉한 손가락이 겹쳐졌다. 시원하고 단단한 촉감이 스친 순간, 아이는 짜릿한 통증에 화들짝 놀라 손을 떼었다. 손바닥에서 빗금진 핏방울이 몽글몽글 배어 나왔다. 소년의 손바닥에도 피 몇 방울이 묻어 있었다. 바위를 올라오면서 긁힌 모양이었다. 상처가 깊지는 않았지만, 여태껏 몰랐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쓰라렸다. 아이는 버릇처럼 입을 상처에 대고 쭉 빨았다. 소년을 아이를 빠안히 바라보았다. 아이는 소년의 시선이 느껴지자 고개를 훽 돌렸다.
"왜. 더럽다고? 신경 쓰지 마. 대충 침 바르면 나아."
아이는 피가 배여 나오는 손바닥을 낼름 핥으며 말했다. 소년은 입술을 빠끔대다 한 손을 뻗어 아이의 손바닥을 잡아 끌었다. 어린애답지 않게 강한 힘이었다. 마치 성인이 당기는 것 같이 강한 완력에 아이는 잠깐 휘청였다. 그러나 불만을 표현할 데도 없이 소년은 아이의 손바닥을 단단히 붙잡고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압박된 상처에서 핏방울이 샘솟았다. 아이는 얼굴을 찌푸렸다. 소년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 수 없었다. 붙잡힌 손목이며 상처가 아렸다. 지금이라도 손을 빼야 할까. 소년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손바닥에 입을 맞추듯 서툴게 굴다가 아이가 하던 모양 그대로 혀를 내밀었다. 붉은 살덩이가 상처를 부드럽게 어루만지자 아이는 손가락을 파득 떨었다. 무더운 바람 속에서 소년의 흰 속눈썹이 옅게 흔들렸다. 소년은 집중한 것처럼 미간을 살짝 좁혔고, 아이는 소년의 오뚝한 코 아래로 살짝 보이는 붉은 혀에 시선을 뺏겼다. 소년은 몇 번이고 아이의 손바닥에 입을 맞추는 시늉을 했다. 소년의 말랑하고 따끈한 혀가 손바닥을 느릿느릿 지나가며 상처를 꾹 짓눌렀다. 동시에 날카로운 치아가 언뜻 스치는 느낌이 났다. 익숙하지 않은 태가 확연했다. 소년은 아이의 모습을 그대로 흉내내는 듯이 보였다. 기이한 일이었다. 아이는 시선을 내렸다. 소년의 쭉 뻗은 허리선 아래는 검은 바위 너머 바다에 살짝 걸쳐져 있었는데, 두 다리가 달린 대신 온통 검푸른 껍데기로 덮여 있었다. 그것은 물고기의 비늘과 닮은 모양새였다. 바닷바람이 아이를 훑고 지나가자 아이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이가 몸을 떨자 소년이 입을 떼었다. 잇새 사이로 흐른 타액이 소년의 혀을 타고 주욱 늘어졌다. 소년이 핥은 손바닥에는 핏자국은 온데간데 없이 축축한 흔적이 남았다. 소년은 아이의 손목을 놓지 않은 채 다른 손을 들어 제 턱을 훔치고, 환히 웃었다. 뿌듯해 보이는 미소였다. 그러나 소년은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소년의 음영 진 목선 너머로 우둘투둘한 돌기 같은 것이 보였다. 아이는 순간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소년은 아이와 비슷했지만, 아이와 같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