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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양이 엄청나게 늘어날 뿐인 방! 본문

샐러드바/란해임

그저 양이 엄청나게 늘어날 뿐인 방!

@녹틸루카 2025. 1. 12. 00:29

양이 복사가 된다고? 그렇습니다. 늘어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말이죠.

 

"도대체 양이 복사가 된다는 게 무슨 말이야?"

"낸들 아나."

백색으로 가득 찬 방.

그 안에서 유일한 색채를 띈 검은 문.

아마란토스는 문 손잡이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것은 둥글었고, 고풍스러운 고딕풍으로 유려하게 장식된 모양이 눈에 띄었다.

기하학적으로 구부러진 고사리와 원, 레이스를 정교하게 흉내낸 황동 사슬들.

이 빌어먹을 상황만 아니었다면 학자로서 면밀히 살펴 보고 싶은 욕구를 불러 일으켰을 테다. 

'그래. 이 뭣같은 상황만 아니었다면.'

아마란토스는 고개를 돌렸다.

한없이 깨끗하고 정갈한 방이었다.

동시에 어딘가 불쾌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것은 분명 눈에 닿는 곳이 온통 하얄 뿐이기 때문이었다.

손자국 하나, 먼지 하나 없이 하얀 벽은 꺾이는 경계가 모호했다.

아마란토스는 고개를 조금 더 꺾어 보았다.

시야의 가장자리에 닿는 저곳은 과연 천장이 맞을까.

아니면 끝없이 이어지는 벽의 일부일까?

이 건물은 제법 층고가 높을지도 몰랐다.

감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하늘을 찌를 듯이.

어쩌면 영원히 높을지도 모른다.

'아냐. 진정하자, 아마란토스.'

아마란토스는 천천히 숨을 가다듬었다.

이 근방에 이렇게 높은 건물이 있는지 머리를 굴려봤자 답은 안 나올 것이다.

차라리 어느 건물의 지하라는 가정을 빼놓아서는 안 된다.

그보다 우선해야 할 문제는 '어떻게 빠져나가는지'겠지만.

아마란토스는 머릿속을 차분히 정리하며 방 안을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그가 줄곧 속으로 세고 있는 시계에 의하면 이곳에 떨어진 지 몇 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빠르면 빠를수록 단서는 더 선명하게 남아 있는 법이나.

그러나...

순백의 벽. 순백의 바닥. 검은 문.

가구라고는 하나 없는 방에서 눈에 띄는 단서는 없었다.

차라리 이 문을 한 번 더 보는 편이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당장 맨눈으로 보이는 문은 그저 문일 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것은 출입구의 용도로 쓰일 만한 나무판자 외에는 아무것도 특이 사항이 없는, 그야말로 '문'에 충실한 사물이었다.

제아무리 학구열 높은 학자라도 일상생활에서 수천만 번을 보았을 사물 하나를 끊임없이 들여다 보기는 고역이었다.

분명 그 위에 찜찜하게 붙어 있는 팻말만 아니라면 진즉 열렸을 테다.

<그저 양이 엄청나게 늘어날 뿐인 방!>

'보통 이런 데에 달린 팻말은 출구 표시가 예의 아닌가? 양이 늘어난다는 게 무슨 말이야. 메에 메에 우는 양인지, 특정 물건의 수량을 말하는 건지...'

아마란토스는 미간을 미미하게 좁혔다.

후자면 곤란한데.

꼭대기 어딘가에서 쏟아지는 순백의 빛이 그의 눈을 파고들었다.

아마란토스는 왠지 모르게 피곤한 기분이 들어 눈가를 문질렀다.

"조사는 끝났어?"

아마란토스의 시야 한가득 은빛 머리카락이 쏟아졌다. 

해임 베네투스. 유능하기로 악명 높은 변호사이자 친애하는 연인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 해임. 글쎄, 잘 모르겠어."

아마란토스는 해임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

그리고 그 역시 자세히 볼 수 있도록 조금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하, 간지러워!"

해임은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제 연인에 기대 문에 시선을 두었다.

"애당초 고민할 필요도 없지 않아? 그냥 '양이 엄청나게 늘어날' 뿐이라잖아? 이 문을 열면 엄청 많은 양들이 튀어나온다든지."

해임은 검은 문틀을 한 손으로 쓸어 보며, 황동 손잡이를 건드릴 듯 말 듯 손가락을 장난스레 까닥였다.

무정한 빛 틈에서 해임의 피스타치오빛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안 돼. 그거 아냐. 참아, 해임."

평소였다면 마음대로 냅뒀겠지만 이 기이한 빛은 껄끄러운 느낌을 주었다.

어쩐지 익숙한 구석이 있으면서도 말려들어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

한 발을 내딛는 순간, 밑도 끝도 없이 끌려들어갈 것 같은 경고성 알림.

아마란토스는 학자로서 인과관계를 따르지 않는 '본능'은 최대한 자제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현재 상황과 같이 단서가 없을 때에는 감각을 활용하는 쪽도 나쁘지 않다는 경험 역시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런 감에 상당히 예민한 편이다.'

최대한 알아볼 수 있는 단서는 최대한 파헤치려 노력하는 편이 좋지.

아마란토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검은 문을 노려보았다.

마치, 그렇게 하면 문 너머를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양 말이다.

검은 문은 여전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묵묵부답이었다.

옆에서 해임이 끊임없이 종알거렸다.

"양떼 무리, 귀여울 것 같지 않아? 말랑말랑하고 따끈따끈한 동물이 한가득이라니."

"글쎄."

아마란토스는 뚱하게 대꾸했다.

만에 하나 정말로 메에 메에 우는 양만 튀어나오는 평화로운 공간일 수 있지 않겠느냐고?

그건 그것대로 곤란하다.

'해임도 양이 얼마나 말을 안 듣고 제멋대로 행동하는지 알면 두 번은 고민하겠지!'

장담컨대, 양은 그의 친척 염소 못지 않을 정도로 고약한 동물이다.

제각기 몰려다니길 좋아하면서도 흥미가 생기면 딴길로 새길 잘하는데, 아무리 솜씨 좋은 양치기라도 이상한 곳으로 샌 양을 잡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시력 나쁘고, 둔한 구석도 있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도리도 없고.

게다가 산에 사는 양들은 염소처럼 산도 탄다.

정말이다.

대체 누가 '어린 양'을 순수하고 사랑스럽다고 여기도록 이미지 메이킹을 했는지 모르겠다.

만일 범인이 있다면 분명 간악한 신도들이겠지.

스스로 양으로 여긴 나머지 평범한 동물인 양마저 귀엽게 만들어버린 모양이다.

유감스럽게도 해임은 뽀얗고 말랑한 모습에 속아 넘어간 모양이지만 나한테는 어림도 없다.

아마란토스는 늘상 그랬듯 해임의 어깨를 가볍게 두 번 두드림으로써 제지했다.

그러나 한 번 흥미가 생긴 해임은 문고리를 열정적으로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것도 곤란한 상황이다.

그의 연인은 하나에 열중할 때면 연구자보다 더한 집중력을 발휘하지만...

"'양이 늘어난다', 늘어난다... 그치! 네가 많아지는 쪽도 좋겠다!"

뭐?

"끔찍한 소리 하지 마."

"질색하기는! 혹시 알아? 똑똑이들이 많으면 연구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 이건 정말로 너를 위한 거라고."

그가 눈을 크게 뜨며 문고리를 톡톡 두드리기 시작했다.

세로로 날카롭게 찢어진 눈동자가 은근히 둥글어지는 것이 보였다.

저거, 보통 고양이들이 장난칠 때 비슷한 눈을 하지 않던가?

얜 용인데도?

큰일났다.

아마란토스는 해임의 손목을 가볍게 붙잡았다.

"그래도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내가 나올 거라고 단정짓지도 말고."

괜찮다.

아직은 수습 가능한 정도이다.

이 녀석이 지금 당장 꽂힌 단어가 '양'이라면, 그 부분만 잘 넘기면 녀석의 인내심을 조금 더 연장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조금만 유혹하면...

"무언가 단서가 있을지도 몰라. 그걸 놓쳐서 네가 위험에 빠지는 상황은 싫어."

아마란토스는 해임을 마주 바라보며 눈꼬리를 느슨히 풀어 보였다.

그러자 대부분의 양 종족 악마가 그러하듯이 유순한 인상이 만들어졌다.

예상대로 해임은 조금 머뭇거리는 눈치였다.

아마란토스의 손 아래서 해임이 고민하는 떨림이 전해졌다.

"네가 많으면 정말로 좋을 텐데. 폭신하고 말랑한 건 많을수록 좋은 거란 말이야."

어휴.

"이 문 뒤에 뭐가 존재할지는 확실하지 않다니깐."

"이 방에 그대로 남아 있는대도 할 수 있는 건 없잖아. 우리는 이미 최선을 다했다고."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물론, 이 안에 갇힌 게 너와 나니까."

이건 또 무슨 소리래.

아마란토스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나 해임은 충분히 할 말을 한 듯, 추가 설명을 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아마란토스는 그의 눈에서 기묘한 확신을 엿보았다.

대체 뭘 믿고 저렇게 당당한 거지?

아마란토스는 입술을 달싹였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덕분에 마음을 다잡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때로는 돌진이 필요할 때도 있다는 뜻이겠지.

"그래, 뭐."

이상한 게 튀어나오면 부수고 지나가면 되지 않겠는가.

나 말고, 얘가.

이쪽은 지능캐라서 몸은 잘 못 쓴단 말이다.

연인의 동의가 떨어지자마자 해임은 문고리를 거의 당길 기세로 꾹 잡았다.

아마란토스는 그의 왼손 위로 오른손을 겹쳤다.

"네가 원한다면, 그래. 문을 열자. 상자 속에 든 것이 무엇일지 확인해보자고."

"좋아. 열어보자!"

달칵.

검은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그 너머에는...

 

일반 가정집의 그것과 거의 흡사한 거실이 있었다.

널찍한 방과 가로로 긴 소파, 부드러운 양탄자.

평범한 집과 다른 점이라면, 양이 그야말로 '지천에 널려 있을' 뿐이었다. 

- 메에.

- 메엥...

- 메에에...

마치 제봉을 마치지 않은 털뭉치를 닮은 것들이 바닥을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가구와 가구 사이를 넘나들었다.

몇몇은 손님에게 용감하게 다가가 다리에 얼굴을 비비기도 하였다.

꿈처럼 비현실적이고 평화로운 광경에 해임은 홀린 듯 쪼그려 앉았다.

양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무릎 위로 올라갔고, 해임은 순식간에 양모 담요를 덮은 것처럼 양들로 뒤덮였다.

- 메에에...

해임은 수도 없이 기어오르는 양들은 하나하나 쓰다듬느라 처음으로 팔이 두 개 뿐이라는 데에 아쉬움을 느꼈다.

"이것 봐, 란! 정말로 양이 많을 뿐이잖아!"

- 메엥.

해임의 목소리에 반응한 듯, 양 한 마리가 조그맣게 울었다. 

뒤따라 몇 마리가 합창을 하듯 울음소리를 냈다.

해임은 첫번째로 울었던 양을 덥썩 집어들었다.

- ... 메엥.

양은 크게 반항하지 않았지만, 눈매를 뾰족하게 떠보이는 것 같았다.

란 말고 다른 양을 이렇게 유심히 본 적은 없었는데.

"란, 보고 있어? 얘는 조금 너를 닮은 것 같기도 하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란? 멍이라도 때리고 있는 거야?"

해임은 고개를 돌려 연인의 그림자를 찾았다.

그곳에는 단지 양이 많을 뿐이다.

"란?"

- 메엥.

- 메에에...

오로지 양떼만이, 하이얀 파도처럼 그의 주위를 휘감고 있었다.

 

 

[Mission! : 에로스와 프시케]

[천 마리 양 중 진정한 연인을 찾아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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