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모임
아쿠아리움 2 본문
그래. 깔끔하게 인정하겠다.
저놈의 체력을 얕봤다.
아마란토스는 카페 의자에 들러붙다시피 기댔다. 그의 체력을 쪽쪽 빨아먹은 애인이란 녀석은 카운터에서 음료 두 잔을 가져오는 참이었다. 해임은 얼음이 가득 담긴 쪽을 아마란토스에게 건네주며 장난스레 웃어 보였다.
“벌써 지치면 어떡해. 놀아준다며.”
“혹시 전생에 보더콜리였어?”
아마란토스는 잔을 받아들었다. 말을 길게 할 여력조차 없었다. 아마란토스는 해임을 한 번 흘겨 보고는 커피를 쭉 들이켰다. 탁, 소리와 함께 떨어진 잔에는 얼음만 남아 있었다.
“용들은 다들 그렇게 체력이 좋은가.”
아마란토스는 한숨처럼 말을 내뱉었다. 해임의 눈매가 금세 가늘어졌다.
“나 말고 다른 용 만나?”
바늘처럼 박히는 시선에 아마란토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럴 리가.”
“그거 종차별 발언이라고.”
해임이 잔을 들었다. 아마란토스는 해임의 표정을 슬쩍 살피며 자신의 잔을 쥐었다. 해임의 손가락은 최소한의 움직임만을 이용해 잔을 올렸고, 그의 목울대가 옅게 일렁인 후, 잔이 다시 내려왔다. 해임의 시선은 줄곧 잔에 머물러 있었다.
“뭐, 덩치가 큰 만큼 기본 체력이 뛰어난 건 사실이지만.”
해임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평소보다 입꼬리가 미미하게 올라가 있었다.
뿌듯해하는 쪽이었나. 뭐 저런 놈이 다 있지.
아마란토스는 입에 물고 있던 얼음을 와작 씹었다. 해임이 싱긋 미소지으며 아마란토스의 뺨을 쿡 눌렀다.
“란. 지금 쯤이면 한 소리 할 시간 아니었어? 엄청 맹한 표정이잖아. 미간도 다 풀어졌고, 볼을 찔러도 조용하네. 힘들어?”
“알면 가만 있어.”
“그치만 드문 모습이잖아. 많이 봐둬야지.”
이것 봐. 말랑말랑. 해임은 아마란토스의 뺨을 쭉 늘려 보였다.
“흐지믈르그…”
아마란토스가 미간을 구기며 해임을 노려봤다. 그러나 해임은 아랑곳 않고 아마란토스의 뺨을 콕콕 누르며 장난쳤다.
“종종 체력을 빼놓아야 하나?”
“그 말을 할 악마는 나 같은데. 좀 봐줘.”
아마란토스는 해임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해임은 의자까지 끌고 와 작정하고 뺨을 괴롭히는 참이었다. 평소에 아예 못 만지게 한 것도 아닌데, 장난 못 쳐서 죽은 귀신이라도 붙었나. 아마란토스는 해임의 양 손을 붙들고 뺨에 입술을 들이박다시피 부딪쳤다. 방금 얼음을 잔뜩 씹은 덕일까, 해임은 깜짝 놀라 부르르 떨었다.
“차갑잖아!”
“차가우라고 한 거지.”
아마란토스는 싱긋 미소지으며 해임의 손을 놓았다. 동시에 어깨에 슬쩍 기대오는 해임을 밀어냈다.
“해임. 여기 밖이야. 더 이상은 안 돼.”
“쳇.”
역시 대관할걸. 해임의 툴툴거림을 뒤로 한 채 아마란토스는 빈 잔을 들고 일어섰다.
“슬슬 살 것 같네. 이리 와, 고래는 보고 가야지.”
-
밝고 화려한 열대어관, 청량한 분위기의 중층관을 지나 고래 구역은 수족관 깊은 곳에 위치했다. 그곳은 바다를 한 조각 옮긴 것처럼 어두웠고, 은은히 비치는 빛은 깊은 파란색을 띄었다.
‘데이트 장소로 좋다는 이유는 이 불빛 탓인가.’
아마란토스는 팔짱을 낀 채 공간을 쭉 둘러보았다.
연인 간의 스킨십을 하기에 어두운 공간만큼 좋은 곳은 없긴 하지. 영화관과 같은 맥락으로 말이야. 그러나 정작 그 애인은 어항의 창을 들여다 보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저걸 어쩌지.
아마란토스는 해임의 옆에 서 창 너머를 들여다 보았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거대한 창 너머로 깊은 물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아득히 먼 천장으로부터 전등빛이 햇살처럼 어른대며 비쳤고, 그 아래로 온갖 종류의 거대한 물고기들이 지나갔다. 아마란토스는 지느러미를 옅게 베인 상어를 보았고, 검푸른 청새치가 손살같이 사라지는 모습과, 잔뜩 주름진 얼굴로 유유히 헤엄지는 거북, 은빛 피라미들의 집합을 보았다. 또한 아마란토스는 물길의 저편을 유심히 관찰했다. 어두운 물속에서 작은 그림자가 보였다.
“거울이네.”
해임이 말했다. 아마란토스가 고개를 들었다. 해임이 싱긋 미소지었다.
“네가 보고 있는 거 말이야. 맞지?”
“응. 그래 보여.”
아마란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해임은 아마란토스의 어깨에 팔을 올려 놓았다.
“수족관은 개방감이 중요하니까. 그래서, 재밌어?”
“글쎄.”
아마란토스는 잠시 고민하다 답을 내놓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고래가 작다, 정도.”
“어쩔 수 없지. 아무리 바다를 본떠도 부피에 한계가 있는걸. 큰 녀석을 데려오기에는 힘들었을 거야.”
“역시 책에서 본 것과는 거리가 있네.”
“응. 그치?”
해임은 유리창을 가볍게 두드렸다. 아마란토스는 해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조금 불쌍한 것 같기도 하고.”
아마란토스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해임은 고개를 내려 아마란토스를 바라봤다.
“그래? 만일 이 안에 있는 게 나라면 어떨 것 같아?”
“너를 어딘가에 가두고 싶지는 않은데.”
“그거 아쉽네. 왜?”
해임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아마란토스는 짓궂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둬 줘?”
“안 돼. 내가 돈 벌잖아.”
“하여간 평범한 반응이 나오질 않아.”
아마란토스는 해임의 머리카락을 벅벅 헝클였다. 해임은 고개를 숙인 채 작게 끙끙거렸다.
“잠만, 란! 엄청 공들여서 손질한 거라고!”
“너도 내 볼 찔렀잖아. 참아.”
아마란토스는 해임의 머리를 꾹 눌렀다. 복복복. 복복복복복. 깔끔하게 넘겼던 머리카락은 금세 곱슬기가 튀어 올라 고수머리로 변했다. 아마란토스는 만족할 때까지 해임의 머리카락을 새둥지로 만든 후, 가볍게 으쓱였다.
“소중하니까 가두기 싫은 거야.”
“글쎄. 잘 모르겠는데.”
해임은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꿍얼댔다. 아마란토스는 해임의 머리를 한번 더 꾹 누르곤, 말을 이었다.
“바다에서 사는 물고기는 하루에 몇천 km를 헤엄친대. 그런데 수족관은 한계가 있잖아. 그런 동물을 한 곳에 오랫동안 가둬 놓으면 반드시 탈이 나는 법이더라고.”
아마란토스는 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푸르른 물 너머에서 고래 한 마리가 유유히 지느러미를 움직였다. 고래의 몸통은 갖가지 상처로 뒤덮여 있었고, 그의 눈은 방향을 알 수 없었다. 아마란토스는 고개를 돌려 해임을 바라보았다. 해임 역시 아마란토스를 바라보았다.
“난 네가 원하는 모든 곳에 가면 좋겠어. 애인으로서도, 친구로서도 말이야. 새로운 것을 접했을 때에 너의 표정은 내가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일 테니까.”
아마란토스는 해임의 콧잔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해임은 동그래진 눈을 깜박였다.
“그러니까, 날 연구하고 있다는 말이야?”
아마란토스는 미간을 팍 구겼다. 때릴까.
“하여간 말을 해도… 뭐, 비슷하지.”
“너무 당당한데?”
“그래서 좋잖아.”
“응.”
해임이 밝게 웃었다.
“그러니까 좋아.”
해임은 아마란토스를 품에 끌어안았다.
“그치만, 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누군가가 나만 사랑한다고 약속해 줄 수 있다면 좁은 어항에 살아도 행복할 거야."
수족관의 푸른 물결과 함께 서늘한 공기가 출렁였다. 폐장 시간이 가까워진 수족관에는 인적이 끊겼고, 때마침 고래가 그들 앞을 지나가면서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아마란토스는 부드러운 어둠 속에서 해임의 피스타치오색 눈동자가 별처럼 반짝이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별 안에는 자신이 있었다. 아마란토스는 한 손을 들어 해임의 뺨을 만졌다. 해임의 고개가 살짝 떨어졌다. 그의 뺨은 조금 뜨겁다 느껴질 만큼 다정한 온도였다.
“왜. 반했어?”
해임은 아마란토스의 손에 뺨을 슬쩍 부볐다. 아마란토스의 손길을 따라 은빛 주근깨가 은하수처럼 펼쳐졌다. 아마란토스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응. 반했어.”
아마란토스는 해임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
휘핑크림 마니마니 주세여
"에스프레소 한 잔이랑… 란, 아메리카노랑 라떼 중에 어느 쪽이 좋아?"
"아메리카노. 얼음 많이."
"아메리카노로 휘핑 크림 많이 주세요!"
"뭐? 아뇨, 휘핑 빼고 얼음 많이 주세요."
" 휘핑 크림 1m 정도 올려주세요!"
"이놈이 돌았나."
찰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