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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작도 본문
노을이 질 때면 외출하지 마시오. 집에서 키우던 개의 무늬가 어둑발에 어른어른하니 꼭 범가죽을 뒤집어 쓴 것 같더라.
"자네. 하나 물어도 되겠는가?"
"도령께서 오셨는데 아무렴, 뭐든지."
"스스로를 동물에 비유한다면 범과 까치 중 어느 것이 좋소?"
"재미있는 질문이로구만."
"별다른 저의는 없으니 자유롭게 답하시게."
"사내대장부로서 '범이올시다'라고 말하고 싶네만, 까치가 맞지."
"그리 답한 이유는 무엇이오?"
"까치가 길조이지 않은가. 좋은 소식을 물고 온다고들 말하는 때문이오. 살기도 팍팍한데, 좋은 이야기라도 들어야지."
"정말이오?"
"그럼. 한 입으로 두 말할까."
"자네의 좋은 이야기란 무엇인가?"
"거 참, 궁금한 것도 많소."
"저잣거리 양민들 모두 자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니 관심이 생길 수밖에."
"어려울 것 없지. 누군들 제 귀에 꿀 발린 소리를 싫어하겠는가? 그런데 사람이란 것이 참으로 아리송한 물건이라 제아무리 좋다 좋다 한들 언젠가는 질리는 법이라오. 하지만 여기, 아첨보다 더 좋은 것이 있소."
"좋은 것?"
"바로 재미있는 이야기이올시다. 가장 높은 곳에 계신 상전님부터 가장 아래 바닥에 들러붙은 거지까지, 재미란 놈을 마다할 작자는 없더구려. 옆집 아낙네가 가시풀로 뒤 씻다가 혼쭐난 이야기부터 코흘리개 녀석이 우물에 빠져 죽다 살아난 이야기까지, 재미만 있다면 가릴 바 없다네. 물론,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는 윗분들이 망신 당하는 이야기이지만. 요근래에는 어느 밤중에 선비가 길을 가다가 산군을 만나 까무라친 일이 그리도 재미나다고 하더래!"
"자신에게 좋은 것보다 타인에게 해가 되는 것에 더 열광한다는 말인가."
"저기 고명하신 선비댁 도령께서 귀천을 마다 않는다는 소문은 다 거짓부렁이구만. 시장바닥 아무나 잡고 물어보시오. 속을 그리 훤히 비추려고 해서야 대관절 누구가 좋아하겠소? 보소, 도령. 난이 꽃을 피울 수 있는 까닭은 날마다 물을 길어다 주고 깨끗이 씻어 주는 인물이 있기 때문이라네. 더군다나, 곱게만 자란 꽃이 입을 연대서 눈여겨 볼 치는 또 누구겠소?"
"과연 그러한가. 온실 속의 난이라."
"이 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사서육경은 말할 것도 없고 공맹도 모르는 이오. 그들이 바라는 말은 입에 바른 경 읽기가 아니라네. 그저 재미, 재미 뿐이지."
"이해하였소. 그렇다면 자네가 말하는 재미는 무엇인가."
"거 참! 지금껏 길게 늘어놓은 혓바닥이 도로 아미타불이 되었구만."
"줄곧 세간이 말하는 재미만 언급하지 않았는가."
"무엇이 얼마나 다르다고."
"나는 지금 자네에 관해서 묻고 있네."
"이 몸으로 말하자면 그저 이야기꾼이지. 이야기를 좋아하고 타인의 귀를 홀리는."
"정말로 그것이 전부인가?"
"더도 않았고 덜도 않았소."
"그렇군. 실례를 끼치게 되었소. 나는 이만 가보리다."
"배웅은 하지 않아도 좋겠지."
"그리하시오. 참... 소문이라니, 생각난 이야기가 있군."
"어떠한 것이길래?"
"밤중에 저잣거리에 나서면 어둑시니를 만난다고 하오."
"재미있구만. 누구한테 들었소?"
"말괄량이 꼬마애가 며칠 동안 집밖을 안 나오길래 찾아갔던 적이 있소. 이불 속에 파묻혀 벌벌 떨길래 이유를 물었더니 귀신을 보았다고 말하더군. 멀리서 보면 허깨비불 두 개가 살랑살랑 인다는데 그것에 홀려 가까이 다가가면 집채만한 그림자가 서 있다지. 기이하고 두려워 꼼짝 않았더니 그 덩치가 점점 커져 하늘을 덮고, 정신이 아뜩하다 못해 이대로 죽는구나 싶어 눈을 끔벅이면 순식간에 사라지고 간 곳도 없다네."
"하하! 뒷간에 갔다가 엎어지고 부끄러워 덮으려는 말이 아닌가?"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닮은 것을 보았다는 애가 한둘이 아니더군. 어린 아이는 순수하니 어른이 보지 못 하는 것을 보는 것일 수도 있네. 자네가 저잣거리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가."
"그래서?"
"아직 누군가가 해를 입었다는 말은 없지만... 조심하게. 먹이를 찾아 어슬렁대는 범이라는 말도 있더군."
"귀담아 듣도록 하지. 잘 가시오, 도령."
"잘 있게. 극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