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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옥(寶玉)

@녹틸루카 2024. 6. 11. 13:29

"손이 귀한 윤 가 댁에 장성한 아들이 하나 있는데, 공부에는 뜻이 없고 허구한 날 나가 놀기만 좋아한다더라. 윤 대인께서 어르고 달래 소학과 중용을 겨우 뗀 이후로 책은 옆눈으로도 보지를 않더래."

"그놈이라면 이제 곧 이립이지 않은가? 안타깝게 되었군. 사내놈이 입신양명하여 효도할 생각은 하지 않는 놈팽이라니!"

"아니오. 듣자하니 또 그렇지만도 않아. 저기 사는 나이 지긋한 선비께서 그 애를 본 적이 있는데, 물가에 앉아서 시경을 읊더군."

"거 참, 신선놀음이 따로 없네."

"행색만 보면 아주 도사야. 머리를 올리지도 않고 아주 풀어헤쳤는데, 옆만 요래조래 땋아서 묶었어. 그 모양이 어린애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것이 참 묘하단다."

"윤 대인 같은 인자하신 분 아래에서 어쩌다 그런 아兒가 나왔다니?"

"그것이..."

어느 봄날에 김 부인께서 침상에 드셨는데 누군가 장지문을 톡톡 두드리더래.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는데 참으로 기이한 노릇이지. 밖을 들여다보니 하이얀 달빛이 방 깊숙한 곳까지 환히 차올라 마치 월궁 항아님께서 내려오시는 듯해. 별도 뜨지 않아 온통 컴컴한 가운데 보름달 하나만 휘영청 떠올랐으니 온통 희기만 하였지. 아름다운 풍경이지 않니. 하지만 김 부인께서는 달이 홀로 있는 모습이 어쩐지 적적하게 보이셨단다. 부인께서는 그분도 모르게 말하셨대. 이 내가 감히 당신의 벗이 되어도 좋을까요? 그 순간, 오색 구름이 피어오르더니 날개옷 곱게 차려입은 선녀님께서 김 부인 앞에 나타나셨단다. 에그머니나! 부인께서는 깜짝 놀라 하마터면 까무라칠 뻔 하셨어. 겨우 겨우 정신을 다잡으시고 절을 올리니 선녀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늘을 떠받치는 주춧돌 아흔 아홉 개가 있는데 그곳에 속하지 못한 돌이 단 하나 있답니다. 모양도 여타의 것들처럼 납작한 대신 둥글둥글하니 무엇을 떠받들거나 아래에 괴기 적당하지 않으며, 자신도 하늘에서 지상을 고고히 내려다보기 싫으니 세상 구경을 하고 싶다고 조르더랍니다. 당신 성격이 곱고 선하며 부부 슬하에 아이가 없으니 이 돌을 드립니다. 부인께서 돌을 받아 드시니 그것은 순식간에 옥玉이 되어 품에 안겼고, 따스하고 부드러운 느낌에 꿈에서 깨시니 선녀님은 온데간데 없고 적막만 가득했다고 하더군. 하지만 활짝 열린 장지문에 스미는 달빛은 언제나 그랬듯이 환하더래. 김 부인께서 기묘한 일을 겪으신 후 꼭 열 달이 지난 날, 떡두꺼비 같은 사내아이를 해산하셨단다. 아이는 어디 모난 데 없이 튼튼했다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갓난애가 응애 응애 울지를 않고 생글생글 웃기만 하더라. 산파가 아이 엉덩이를 찰싹 때려봐도 얼굴을 찡그리기만 했더군. 그 때문일까, 어렸을 적에는 잔병치레를 제법 했단다. 어린애들은 앓으며 큰다지만 숨이 간당간당한 적이 한두 번이어야 말이지. 언제 한 번은 이유도 모를 열병에 걸려서 죽다 살아난 적도 있대. 조막만한 몸에 열이 펄펄 끓어서 애가 헐떡대니, 열 내리는 데에 좋다는 오만 약초를 써보고 수소문을 통해 이름난 의사를 모셔봐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지. 이대로 약관도 안 된 어린애 초상 치르는 줄 알고 윤 대인께서 크게 상심하셨어. 하지만 김 부인께서는 의연하셨대. 하늘이 보낸 아이이니 금방 훌훌 털고 일어날 테고, 행여 정말 잘못되는 한이 있는들 하늘로 돌아간 일이니 슬퍼할 것 없다고 말씀하셨단다. 어미의 말을 들은 걸까. 아이는 그로부터 꼭 보름 되는 후에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지. 지독한 열병을 앓고나니 작게라도 아픈 일 하나 없이 사지 튼튼하게 자라더라. 하나 문제는 하도 곱게 자라 학문에 뜻이 없고, 공부를 시켜두고 잠깐이라도 눈을 떼면 기막히게 산으로 들로 놀러 나간다지. 다행히 막돼먹은 성격은 아니란다. 더군다나 어린애들을 참 좋아해 꼬마 녀석들 한둘을 챙겨주고 다녔다는군. 그런데 애들이 자기 친구를 한둘씩 데려왔고, 졸졸 따라다니는 애들 수가 늘더니만, 결국은 대장 노릇을 하고 다닌대. 장날만 되면 꼬맹이들 데리고 이리로 우르르, 저리로 우르르 다니니 구경꾼들마다 입을 모아 세상에 둘도 없을 진풍경이더라 말했다. 마침 오늘 오일장이 열리니, 보고 싶다면 한 번 가보는 일은 어떠하겠나?

"떼잉. 그래봤자지. 다 큰 놈이 하는 일이라고는 코흘리개 대장이 전부라니!"

"재미있지 않은고? 신선놀음 하자고 내려왔다니 신선처럼 사는 게지. 다시 보면 그 녀석 만한 신선이 또 어디 있겠어?"

"노자 이르시되 최상의 도는 물과 같소(上善若水). 자신보다 어린 것들을 품을 줄 알고 항상 유쾌하게 사니, 그보다 더한 즐거움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참으로 옥玉 같이 깨끗한 자로구만."

"맞네. 그 자의 이름은 보옥(寶玉)이오. 윤 가의 보옥, 윤 보옥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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