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이 메라이
그리고 몇 시간이고 커다란 회색빛 연못가에
작은 돛단배를 손에 들고 쪼그리고 앉아 있다.
그러다 동그란 물살을 헤치고 똑같이 생긴
더 멋진 배들이 지나가면 내 것은 잊고 만다.
그리고 빠져들어 가며 연못에서 내미는
창백하고 조그만 얼굴을 생각해야 한다.
아 어린 시절, 아 비교할 수 없는 그 무엇,
어디로 갔는가? 어디로?
어린 시절(R.M. 릴케) 中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불합리한 처사예요."
소녀는 낮은 의자에 앉아 두 다리를 앞뒤로 흔들며 말했다. 소녀가 발길질을 할 때마다 드레스에 달린 귀여운 리본과 레이스가 화려하게 팔락였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후작의 주의를 끌기 부족했다. 소녀는 구둣굽을 딱딱, 부딪쳐 소리를 냈다.
"듣고 있어요?"
후작이 뒤를 돌아보았다.
"물론이지, 반. 무슨 일이니?"
"불합리한 처사라고 말했어요."
후작은 평소와 같이 고요한 얼굴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후작은 지옥에서 유명한 보석상으로, 귀족의 지위에 오르기까지 무력은 물론 굉장한 부가 큰 뒷받침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알음알음 명성을 떨치게 된 까닭으로는 악마답지 않은 깔끔한 거래와 진중하고 냉정한 성격이 있는데, 이는 표정을 표현할 수 없는 새 머리뼈를 닮은 얼굴의 역할이 크다. 하지만 소녀는 오랜 시간 동안 관찰을 통해 눈구멍 안 녹빛 불꽃의 미약한 떨림을 읽어내는 법을 터득했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만일 후작에게 눈썹이 있었다면 지금쯤 한쪽이 크게 뛰어올랐을 테다. 소녀는 두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모은 채 인내심 있게 말했다.
"지금껏 당신의 수업은 정말로 인상 깊었어요. 인간은 겉모습에 굉장히 약하다. 그들의 형태를 따라함으로써 경계를 늦춘다면 보다 쉽게 무릎 꿇릴 수 있다고 말씀하셨죠. 단, 어줍잖은 흉내는 되려 혐오를 일으켜요. 따라서 평소 인간의 행동거지를 몸에 익혀둬야 한다고요. 이해했어요. 하지만..."
소녀가 왼손을 들어보였다.
"어린 인간의 몸으로는 득보다 실이 많아요. 공포를 심어줄 수도 없고, 신뢰를 얻을 수도 없고, 하다못해 유혹도 못하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모습을 하길 원하신 이유가 뭐죠?"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영리하구나. 괜찮은 질문이야. 악마는 유체와 성체를 구분하지 않는단다. 왜 그럴까?"
소녀의 고개가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유체는 반드시 의존이 필요하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으니까요. 우리는 완전하니까 다른 것에 기대지 않아도 돼요."
"하하, 너다운 답이로군. 물론... '우리'는 다른 것들과는 다르게 스스로 생명을 얻은 존재야. 따라서 신과 같다고 할 수 있지. 다만, 반. 그것이 전부가 아니란다. 얻은 것이 있다면 잃는 것도 있어야 공평한 법이다. 너는 불멸을 대가로 무엇을 잃었을까?"
"유아기를 잃었단 말씀이신가요?"
소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명백히 불만을 표시하는 행동에 후작은 옅게 미소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소녀가 새까맣게 잊어버린 점을 상기시켜 주었다.
"이런. 중간에 끼어드는 행동은 귀족답지 못해."
"실례했습니다."
소녀의 시선이 잠깐 후작을 향했지만, 이내 눈꺼풀 아래로 사라졌다. 소녀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착한 아이구나. 그래, 나는 그렇게 생각한단다. 개가 꼬리를 잃어버리고 인간이 된 것처럼, 인간은 유아기를 잃어버리고 악마가 되었지. 인간이었을 적 기억을 잃어버린다고 하여서 영혼에 새겨진 흔적까지 지워지지는 않아. 따라서 악마는 평생 동안 성장하지 못한 채로 남을 수밖에 없단다. 지극히도 자기 중심적이고 욕망에 충실한 채로 말이야. 그런 것은 짐승이라고 불러야지. 나는 네가 '유년기'를 보낼 수 있길 바란단다. 작은 새야, 명심하렴. 싸움은 동등한 지위끼리 하는 것이다. 이성을 잃은 짐승을 상대하는 일은 사냥에 불과해. 너는 분명 훌륭한 사냥꾼이 될 거야. 그리고 먼 훗날..."
후작은 소녀의 머리카락을 능숙하게 정리해주고 손을 떼었다. 소녀는 순종하는 태도로 후작을 올려보았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아이의 커다란 눈동자는 고요한 연못과도 같았으며 - 그 속은 감히 짐작하길 상상하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로 검었다 - 아이의 뺨은 얇은 석고를 바른 듯이 창백하였으며 - 아이의 무릎에 얌전히 놓인 손은 시체의 그것처럼 차가워 보였다 - 순간, 어디선가 새 울음소리가 들렸다. 까르륵. 소녀가 미소지었다.
"먼 훗날이 오면요, 아빠. 그때는 아빠를 사냥할 수 있을까요?"
소녀가 두 팔을 쭉 벌려 후작을 재촉했다. 후작은 딸을 가볍게 안아 올렸다.
"기다리고 있으마. 우선은 낮잠 시간이구나."
"아직 졸리지 않은걸요."
"어린 아이는 반드시 낮잠 시간을 가져야 한단다. 수업의 일환이라 생각하렴."
소녀는 눈을 굴리다 후작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럼 이따 봐요, 소녀는 후작의 귓가에 아주 조그맣게 속삭이고 눈을 감았다. 이윽고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후작은 소녀의 어깨가 천천히 오르내리는 모습을 내려다보다 조심스럽게 안락 의자에 앉았다. 과연 딸아이는 스스로 말한 것처럼 작고, 어렸으며, 그에게 의존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딸이 어린 아이답게 구는 모습을 좋아했다.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다른 악마들보다 훨씬 빠르게 습득하고, 훨씬 이르게 조용해진 때문일지도 모른다. 또는 답지 않게 가르치는 일에 흥미가 생긴 덕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만에 하나, 이 순간이 가능한 한 오랫동안 지속되길 바란 탓일지도 모른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집, 따스한 난로 앞에서 잠이 든 딸을 품에 안은 채... 그는 딸의 등을 느릿느릿 쓸어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딸은 어느샌가 정말로 잠들어 몸에 힘을 뺀 채 그에게 완전히 기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