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비
아이비(Ivy): 진실한 애정, 행운이 가득한 사랑
"란! 아직 멀었어?"
해임의 목소리가 방문 너머에서 울렸다. 아마란토스는 방금 입었던 옷을 침대에 던져 버렸다. 휙, 날아오른 셔츠가 온갖 옷가지의 산에 사뿐히 안착했다.
"거의 다 했어!"
그 말을 뒤로 하고, 아마란토스가 방문 밖으로 겨우 겨우 기어나온 지는 해임의 재촉 후 10분이 훌쩍 넘긴 뒤의 일이었다. 해임은 팔짱을 낀 채 아마란토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약속보다 훨씬 늦었네. 시간이라면 칼 같이 잘 지키는 양돌이가 무슨 일일까?"
해임의 시선이 쭈뼛쭈뼛 선 아마란토스에게 닿았다. 평소에는 죽어도 입기 싫다던 셔츠에 볼로 타이, 그럭저럭 구색을 갖춘 검은색 슬랙스. 해임이 눈을 동글게 뜨자 아마란토스는 셔츠 카라를 매만지며 해임의 시선을 슬슬 피했다. 한쪽 어깨로 얌전하게 빗어 넘긴 흰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알아. 셔츠를 자주 입을 일이 없다는 사실 정도야 너도 알잖아. 그렇게 쳐다보지 마."
해임은 자신의 애인을 꽉 끌어안았다. 아마란토스가 품 안에서 꼼지락거렸다. 웩. 숨 막혀. 저리 비켜. 그러거나 말거나, 해임은 아마란토스의 머리를 복복 쓰다듬었다.
"하하, 란! 데이트라고 꾸민 거야? 그것도 내 취향으로? 이렇게 나오면 화난 척을 할래야 할 수가 없잖아."
해임의 손가락이 아마란토스의 머리카락 틈을 세심하게 파고 들어갔고, 날카로운 손톱은 그의 머리끈을 톡 끊어냈다. 한순간에 머리카락이 흩어지며 쏟아졌다. 해임은 머리끈을 슬쩍 자신의 주머니에 넣으며 아마란토스의 머리를 슥슥 매만졌다.
"기껏 묶은 머리를 끊어먹는 짓은 대체 무슨 예의지?"
아마란토스가 한쪽 눈썹을 치켜 세우며 해임을 노려보았다. 해임은 생긋 미소지었다.
"풀은 쪽이 더 어울리는걸."
"언제는 산발로 하고 다니지 말라더니."
"귀신 같이 풀어헤치지만 말라는 뜻이지."
쪽. 해임이 아마란토스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아마란토스는 그에 맞춰 해임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순식간에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만큼 거리가 좁혀졌다. 둘의 시선이 맞물렸다. 해임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지기 전 입을 틀어막은 쪽은 아마란토스였다.
"미친 놈아. 나가기 직전에 하자고?"
"난 그래도 상관 없는데."
해임이 눈꼬리를 샐쭉 접으며 미소지었다. 그의 손은 이미 아마란토스의 어깨를 감싼 채 뒷목을 지분거리던 참이었다.
"란. 내가 머리 넘긴 모습을 좋아하잖아. 그렇지?"
아마란토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평소에는 대충 챙겨 입고 다니다가 오늘만 애인의 취향에 맞춘 아마란토스와 마찬가지로, 해임 또한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마란토스의 취향에 꼭 들어맞았다. 한쪽으로 넘긴 은빛 머리카락에 위 아래로 흰 정장. 아마란토스는 해임의 말에 대답을 하는 대신 그의 귓바퀴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귀를 뚫은 적이 있었어?"
해임의 귓가에는 그의 주근깨와 비슷한 색을 한 둥근 귀걸이가 매달려 있었다. 해임이 아마란토스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쳤다. 아마란토스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아니. 하지만 네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 정도야 잘 알고 있어."
해임은 고개를 숙여 아마란토스의 뺨에 입을 맞췄다. 쪽. 다시 한 번 낯부끄러운 소리가 울렸다. 해임은 한 손으로는 아마란토스의 손목을 잡은 채 나머지 손을 뻗어 아마란토스가 매었던 볼로 타이를 끌어 내렸다. 녹색 보석이 박힌 브로치가 순식간에 미끄러졌다. 아마란토스는 해임의 눈에서, 살짝 왼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톡, 아마란토스의 첫 번째 단추가 열리는 참이었다. 아마란토스는 말 없이 해임의 귀걸이를 쭉 잡아당겼다.
"아야!"
해임이 자신의 귀를 잡고 낑낑거렸다. 아마란토스는 해임을 뒤로 한 채 자신의 손에 들린 귀걸이를 바라보았다.
"귀찌네."
"당연하지! 뚫는다 해도 즉시 막혀버리는걸!"
눈꼬리에 맺힌 눈물 한 방울. 해임의 주근깨가 눈에 띄게 반짝였다. 어지간히도 민망한 모양이었다. 그가 조그맣게 툴툴거렸다.
"하여간 무드 없긴."
아마란토스는 귀걸이를 들어 보였다.
"음. 이런 취향이었나... 싶어서."
동그란 링 모양의 귀걸이가 형광등 불빛 아래 반짝거렸다. 평소 화려한 장신구를 즐겨 할 법한 외모에 어울리는 물건은 아닐 뿐더러, 아무 무늬도 없는 은색이라는 점이 눈에 띄었다.
"앙증맞은 모양이 귀엽긴 한데, 조금 더 화려한 쪽이 취향에 맞지 않았어?"
아마란토스의 시선이 해임을 향했다. 해임은 고개를 숙여 아마란토스의 눈높이에 맞췄다. 둘의 시선이 다시 한 번 맞물렸다. 1초, 2초, 3초... 조용한 침묵 끝에 해임이 먼저 웃음을 터뜨렸다.
"꾸민 보람도 없게 얼굴만 보네."
"좋으면서."
"응."
... ...
"문득 궁금해서 물어보는데, 내가 앞머리를 올린 모습을 좋아하는 이유도 얼굴이 잘 보여서야?"
"응."
아마란토스는 손 안에서 귀걸이를 도르륵 굴려보였다.
"조금 더 길게 내려오는 종류를 달아도 예쁠 것 같은데. 너니까. 그래도..."
아마란토스는 귀걸이를 자신의 귀에 끼웠다. 그의 오른쪽 귀에서 조그만 귀걸이가 빛을 발했다. 조금 걸리적 거리기는 한데, 나쁘지는 않네. 아마란토스는 자신의 귀를 만지작거리다 해임을 올려보았다.
"머리끈 가져갔으니까, 이건 내가 가져도 되지? 해임."
아마란토스가 해임을 향해 싱긋 미소지었다. 해임은 말 없이 아마란토스를 빤히 쳐다봤다. 그의 초록빛 눈 안에서 새파란 불꽃을 닮은 무언가 일렁였다. 아. 이거 불안한데. 얘 눈깔이 왜 돌았지? 대체 어느 부분에서? 아마란토스가 속으로 생각하던 참이었다. 해임이 아마란토스를 번쩍 들쳐 안은 채 그대로 방으로 직행했다. 아마란토스가 해임의 등짝을 퍽퍽 내리치며 버둥거렸다.
"야, 미친 놈아! 진정 좀 해 봐! 당장 출발해도 예약 시간에 아슬아슬할 마당에."
"먼저 늦은 쪽이 누구더라?"
나 아직 화났는데. 해임은 눈매를 슬쩍 접으며 샐샐 미소지었다. 아마란토스는 몸에 힘을 쭉 뺀 채 툴툴거렸다.
"용들은 다들 그렇게 속이 좁은가?"
"아마도."
말을 말아야지. 아마란토스는 한숨과 함께 안경을 벗어 접어 넣었다.
"좋아. 마음대로 해. "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해임은 아마란토스에게 입을 맞췄다. 아마란토스는 해임의 머리를 껴안은 채 고개를 살짝 틀었다. 하나처럼 엉겨 붙은 둘의 뒤로 방문이 닫혔다.
"근데 있잖아, 그거 예전에 너가 준 거야."
"진짜? 새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어지간히도 무드가 없어야지. 네가 줘놓고는 안 어울린다고 하면 어떡해?"
"......"
"바보 양돌이."
"바보 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