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상
[한 잔의 차보다 더 좋은 것은 잠깐의 낮잠 뿐이랍니다.]
오전의 색채는 새벽을 깨우는 눈부신 파란색에 가깝다. 태양마차가 어둠을 뚫고 박차를 가하면 밤새 내린 비는 나뭇잎에 맺힌 이슬이 되고, 넘실대는 깊은 바다에서 눈을 뜬 빛은 수탉의 부리 위에서 힘찬 울음으로 다시 태어난다. 세상의 가장 높은 곳에서 소리는 시작되어 사자와 영양을 깨운다. 모든 꽃의 봉오리를 한번에 틔워내고, 단잠에 빠져 있던 이들의 창문을 단박에 열어 젖히며 차가운 공기를 불어 넣는다. 작열하는 젊음의 박동, 숨김 없는 어린이의 웃음소리야말로 오전의 세상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그렇다면 오후는? 이토록 거칠 것 없이 뻗어나가는 빛깔의 뒤를 슬그머니 따라오는 시간은 어떨까.
한낮의 태양이 기운찬 젊은이라면 느지막한 햇살은 귀부인에 비유할 수 있다. 오전의 이름이 열정과 활기라면 오후의 이름은 휴식과 사색이다. 오후는 오전에 비해 한결 무딘 구석이 있으며, 발랄하게 움직이던 갓난애조차 잠시 멈춰서 정확히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고민에 빠지도록 이끈다. 불꽃이 사그라들고, 정체된다. 그러나 하나의 교향곡에서 쉼표가 음표에 비해 못나다고 결코 말할 수 없듯이 오후 또한 오전과 같은 – 어쩌면 그보다 더 – 강력한 힘이 있다. 따사로이 내리쬐는 햇살 아래서는 누구든지 졸음을 참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잠깐 산책을 즐기며 느긋한 시간을 보낼 권리를 갖는다. 윙윙대며 돌아다니던 자동차들은 미지근한 아스팔트 위에서 느릿느릿 기어다니고, 개와 고양이는 창문 앞에서 서로를 향해 사납게 구는 대신 몸을 넙죽 포갠 채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황금빛으로 물들어가는 세상 속에서 풍요와 안식을 기대하며 다시금 찾아올 저녁을 기대한다. 잔잔한 물결과 같은 속삭임과 화합은 오롯이 오후의 시간에서 생겨나는 일이다. 여기, 공기 중에서 반짝이는 먼지가 춤추는 소리만 들리는 방 역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커튼의 틈새로 한 줄기 햇살이 비쳐들었다. 남성이 눈을 찡그렸다. 그와 동시에 남성의 품 안에서 곤히 자고 있던 여성이 뒤척였다. 푸름을 넘어 여느덧 노랗게 변한 햇살이 둘의 눈꺼풀에 내려앉은 채 장난꾸러기 요정처럼 나풀거리며 뛰어다녔다.
일어나, 일어나! 해는 이미 숲속을 지나 멀리 넘어가고 있단다. 지금 자고 있는 게으른 아이는 한밤중에 침대 밑 괴물이 와서 데려가지. 어린 시절의 잔상이 둘의 귓가에서 재잘거렸다. 짓궂은 목소리에 남성은 눈을 떴지만, 여성은 여전히 조그만 불평을 웅얼대며 요정을 쫓아내기 위해 남성의 팔 밑으로 얼굴을 돌려 묻었다. 보라, 빛나는 햇살 아래서의 여성이란 얼마나 아름다운지. 또 쏟아지는 졸음을 구태여 막지 않고 온전히 취한 채 머무르는 여성은 얼마나 매혹적인지! 남성은 한 손을 들어 여성의 눈가에 작은 그늘을 드리웠다. 여성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지면서, 남성을 끌어안던 손의 힘이 느슨해졌다. 남성은 여성의 고른 숨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무슨 수를 써도 여성을 깨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요정은 이제 더듬이를 축 늘어뜨린 채 여성의 머리카락 위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발그레한 뺨. 남성의 시선이 여성의 뺨에 유독 오래 머물렀다. 단잠에 빠져든 이를 괜히 건드려 방해하는 짓은 절대 근사하다고 말할 수 없을 거야, 남성이 생각했다. 하지만 동시에, 얌전히 잠든 아기 천사의 이마에 키스하고 그 귀여운 뺨을 가볍게 두드리고 싶은 충동은 누군들 참아내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사랑스러운 존재를 향한 찬사는 대개 미소와 스킨십으로 표현되기 마련이지 않는가.
그는 다른 손을 뻗어 여성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남빛 머리카락 위를 거의 날 듯 움직이던 손은 여성의 감긴 눈을 조심스레 쓸었다. 속눈썹이 아주 희미한 바람에 흔들리는 꽃처럼 파르르 떨렸지만 여성은 깨지 않았다. 어쩌면 여성은 짐작했던 것보다 깊이 잠든 모양이었다. 남성은 약간의 장난기, 그리고 애정을 담아 동그랗고 귀여운 코를 가볍게 두드렸다. 여성의 코는 완벽하게 조형되지는 않았지만, 남성은 여성이 완벽할 때보다 지금이 틀림없이 훨씬 아름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이 자연의 모든 사물보다 그것을 모방해서 다시 만들어낸 예술 작품에서 보다 크나큰 감상을 얻는 것처럼, 때로는 불완전이 완전함보다 아름다운 법이다. 이미 주어진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상상력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때, 작은 손이 불쑥 올라와 남성의 손을 붙잡았다. 남성은 여성의 코를 살짝 누른 자세 그대로 얼어붙었다. 여성의 눈은 반쯤 감겨 있었지만 짙은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분명히 남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깨운 걸까요?”
“아마도요. 속눈썹을 간질일 때부터… ….”
“미안해요. 조금 더 자도 돼요.”
남성이 여성의 눈가를 살짝 토닥이며 속삭였다.
여성의 입술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리암은요, 손이 참 예뻐요. 항상 손이 예쁘다고 생각했어.”
여성은 느릿느릿 말하며 남성의 손을 끌어다 뺨에 대었다. 잠에서 막 깨어난 사람 특유의 은근한 온기가 손바닥을 가득 채웠다. 뒤이어 뽀뽀 세례가 이어졌다. 남성은 간지러운 장난에 대한 보답으로 여성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여성이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한 번 더 해줘요.”
여성이 남성의 목에 팔을 둘러 안았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속으로 여성의 손가락이 스몄고, 여성은 남성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빗질하는 시늉을 했다.
“간식 만들어줄까요?” 여성이 소곤거렸다.
남성은 옅은 침음을 흘리며 여성의 머리카락에 뺨을 부볐다.
“으음, 아뇨. 괜찮아요.”
“왜요?”
여성은 감기는 눈을 애써 깜박이며 다시 물었다. “좋아하잖아요.”
남성은 여성의 허리를 감싸안으며 몸을 웅크렸다.
“당신 머리카락에서 버터 향이 나거든요.”
“정말로요?”
“언제나요.”
남성은 눈을 감으며 여성을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무성한 나뭇가지 너머로 해가 모습을 감추기 전 마지막 빛을 흩뿌렸다. 커튼이 잔잔한 미풍에 살랑였다. 따스한 붉은빛 햇살은 더 이상 눈부시지 않았고, 밤을 맞이할 모두들에게 굿나잇 키스를 보내며 희미해져갔다.
“이대로 조금 더 있고 싶어요. 조금만 더… 잘 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