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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매미의 껍데기를 본 적 있는지 모르겠다. 매미는 꼬박 몇 년을 땅 속에 묻혀 있는데, 그것은 오로지 여름철 한낮 노래하기 위해서란다. 수분을 머금은 공기가 대지를 달구기 시작할 때 매미는 날아오른다. 맴-- 맴-- 찌르르르-- 맴-- 맴-- 찌르르르-- 하나가 죽어도 다른 하나가 맴-- 맴-- 찌르르르-- 목청 높여 우는 일 빼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진실로 매미의 축복이다. 나는 잠깐 구름이 드리운 새에 고개 들어 연등에 적힌 이름을 하나 하나 가슴에 헨다. 김00. 박00. 정00. 얼굴 모르고 사는 곳 모르는 당신들이 연등을 다는 표정을 상상한다. 무슨 이유로 이름 석 자 바람결에 맡기었는가? 그것은 허황되었다. 미신일 뿐이다. 당신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등..
눅진한 여름밤에는 돌연 바다를 찾고 싶어진다. 밤바다는 온통 시커멓고 사방 적적한 가운데 파도만 친다. 철썩, 처얼썩대며 저들끼리 몸을 부대낀다. 끊임 없이 얼키고 설키는 파도라 별빛 한 점 끼어들 데가 없다. 암흑. 그 불길한 검정색을 보고 있자니 괜히 등골이 오싹해진다. 또한 냅다 뛰어들고 싶은 충동이 인다. 바람이 귓가에다 대고 부드럽게 속살이면, 누군가 등을 살짝이라도 떠민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러한 심정은 자살충동이라고 이름 붙일 수 없다. 까마득한 절벽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감상과 비슷할 뿐이다. 그렇다. 그것은 절벽이다. 수많은 선이 범람하는 가운데 붙잡힐 수 있는 것이라고는 무엇 하나 존재치 않는다. 그리하여 비로소 홀로될 수 있다. 나는 경계에 선 채, 하이얀 포말을 발가락 사이사이 ..

노을이 질 때면 외출하지 마시오. 집에서 키우던 개의 무늬가 어둑발에 어른어른하니 꼭 범가죽을 뒤집어 쓴 것 같더라. "자네. 하나 물어도 되겠는가?" "도령께서 오셨는데 아무렴, 뭐든지." "스스로를 동물에 비유한다면 범과 까치 중 어느 것이 좋소?" "재미있는 질문이로구만." "별다른 저의는 없으니 자유롭게 답하시게." "사내대장부로서 '범이올시다'라고 말하고 싶네만, 까치가 맞지." "그리 답한 이유는 무엇이오?" "까치가 길조이지 않은가. 좋은 소식을 물고 온다고들 말하는 때문이오. 살기도 팍팍한데, 좋은 이야기라도 들어야지." "정말이오?" "그럼. 한 입으로 두 말할까." "자네의 좋은 이야기란 무엇인가?" "거 참, 궁금한 것도 많소." "저잣거리 양민들 모두 자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니 관..

"수족관 갈래?""갑자기? 예약하려면 시간이 좀 필요한데...""응? 식당도 아니고, 뭔 수족관을 예약을 한대."... ..."대관하지 마.""힝." "그나저나 무슨 바람이 들은 거야, 란? 평소에는 방에 콕 틀어 박혀 있던 학자님께서 먼저 나오자고 할 줄은 몰랐는걸.""이 새끼가 잘하다가 한 번씩 속을 긁는다."아마란토스는 가차 없이 상대의 등짝을 후려갈겼다. 짝! 경쾌한 소리와 함께 해임이 등을 부여잡으며 낑낑거렸다. 해임의 눈가에 작게 물방울이 맺혔다."내가 틀린 말 했나! 평소에는 죽어도 나오지 않았잖아."어지간히도 억울한지 해임은 입술을 삐죽이기까지 했다. 아마란토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해임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주둥아리를 잡아 묶어 버리기 전에 집어 넣어."애인의 열렬한 시선 끝에 해임의 입술..

체스와 카드는 '귀족적인' 게임이지만, 여러 면모에서 아주 다릅니다. Hit or Stay?후작의 시선이 아이를 향했다. 아이는 자신의 자리를 지킨 채 조그만 손에 쥔 카드 두 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의 눈은 밤의 호수처럼 고요했다. 단, 한 점의 달빛도 허용치 않으리라. 어둠은 아주 미약한 촛불에도 쉬이 사라지지만 보다 아득한 심해 앞에서는 조각배이든 강철 배이든 부질 없이 흩어져 가라앉을 뿐이다. 평범한 악마와 귀족은 바로 이러한 점에서 궤를 달리한다.악마들은 누구나 분노를 타고난다. 믿었던 인물에게 배신 당하거나, 동화 몇 푼에 팔려가거나, 골목에서 재수 없게 칼을 맞는 등으로 악마에게 바쳐지는 인간의 영혼이 악마로 다시 태어나기 때문이다. 당연히 인간일 적의 기억은 땅 위에 두고 오고..

"손이 귀한 윤 가 댁에 장성한 아들이 하나 있는데, 공부에는 뜻이 없고 허구한 날 나가 놀기만 좋아한다더라. 윤 대인께서 어르고 달래 소학과 중용을 겨우 뗀 이후로 책은 옆눈으로도 보지를 않더래." "그놈이라면 이제 곧 이립이지 않은가? 안타깝게 되었군. 사내놈이 입신양명하여 효도할 생각은 하지 않는 놈팽이라니!" "아니오. 듣자하니 또 그렇지만도 않아. 저기 사는 나이 지긋한 선비께서 그 애를 본 적이 있는데, 물가에 앉아서 시경을 읊더군." "거 참, 신선놀음이 따로 없네." "행색만 보면 아주 도사야. 머리를 올리지도 않고 아주 풀어헤쳤는데, 옆만 요래조래 땋아서 묶었어. 그 모양이 어린애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것이 참 묘하단다." "윤 대인 같은 인자하신 분 아래에서 어쩌다 그런 아兒가 나왔다니..

아이비(Ivy): 진실한 애정, 행운이 가득한 사랑 "란! 아직 멀었어?"해임의 목소리가 방문 너머에서 울렸다. 아마란토스는 방금 입었던 옷을 침대에 던져 버렸다. 휙, 날아오른 셔츠가 온갖 옷가지의 산에 사뿐히 안착했다. "거의 다 했어!"그 말을 뒤로 하고, 아마란토스가 방문 밖으로 겨우 겨우 기어나온 지는 해임의 재촉 후 10분이 훌쩍 넘긴 뒤의 일이었다. 해임은 팔짱을 낀 채 아마란토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약속보다 훨씬 늦었네. 시간이라면 칼 같이 잘 지키는 양돌이가 무슨 일일까?"해임의 시선이 쭈뼛쭈뼛 선 아마란토스에게 닿았다. 평소에는 죽어도 입기 싫다던 셔츠에 볼로 타이, 그럭저럭 구색을 갖춘 검은색 슬랙스. 해임이 눈을 동글게 뜨자 아마란토스는 셔츠 카라를 매만지며 해임의 시선을 슬슬 ..
사랑을 몰라도 사는 데에는 문제가 되지 않나요?그렇다면 어쩐 이유로 사 - ㄹ - ㅁ - 은 사람과 사랑을 닮은 이름을 하나요?사 - ㄹ - 암을 사라 - ㅇ - 하지 않는 사 - ㄹ - ㅁ 은 의미 없나요?사 - ㄹ - ㅁ 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나요?사 - ㄹ - 암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나요?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푸는 자는 황제가 된다. 그것을 풀기 위해서는 오직 자르는 수밖에 없다. "계약은 없던 것으로 하지."백작은 자신의 모자를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만 가보겠네."상대는 적잖이 당황한 듯 보였다. 네 개의 눈이 요란스레 움직이며 백작을 잡으려고 허우적대었다. 하지만 백작은 돌아보지 않았다. 상대는 그 무엇으로도 백작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음을 알아채자 곧이어 백작을 향해 험한 말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은 불그죽죽하게 물들었고, 여덟 개의 팔에서 날카로운 칼날이 돋아났다. 그는 괴성을 지르며 발을 쿵쿵 구르기 시작했다.최근 떨어진 것들은 예의가 없군. 더 이상 예의를 지킬 이유는 없겠어. 백작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백작의 눈을 향해 칼날이 날아들었다. 쇄애액, 어디선가 작..

그리고 몇 시간이고 커다란 회색빛 연못가에 작은 돛단배를 손에 들고 쪼그리고 앉아 있다. 그러다 동그란 물살을 헤치고 똑같이 생긴 더 멋진 배들이 지나가면 내 것은 잊고 만다. 그리고 빠져들어 가며 연못에서 내미는 창백하고 조그만 얼굴을 생각해야 한다. 아 어린 시절, 아 비교할 수 없는 그 무엇, 어디로 갔는가? 어디로? 어린 시절(R.M. 릴케) 中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불합리한 처사예요." 소녀는 낮은 의자에 앉아 두 다리를 앞뒤로 흔들며 말했다. 소녀가 발길질을 할 때마다 드레스에 달린 귀여운 리본과 레이스가 화려하게 팔락였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후작의 주의를 끌기 부족했다. 소녀는 구둣굽을 딱딱, 부딪쳐 소리를 냈다. "듣고 있어요?" 후작이 뒤를 돌아보았다. "물론이지, 반. 무슨 일이니?"..